엄마 姓도 쓸 수 있게 법개정 추진 성평등 등 사회적 추세·다양성 반영 미혼부 자녀 출생신고 요건 완화 급하게 추진 땐 사회적 혼란 야기
동거·사실혼 부부·위탁가족 대상 포함 사유리 같은 비혼 출산도 인정 방침 종교·보수단체 즉각 반발 진통 예고 공론화 통한 사회적 합의 과정 필요 다문화 가정 혐오 발언 금지법 신설 자녀 양육 의무 미이행 땐 상속 제외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이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다양성과 보편성, 성평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족정책을 개편하는 내용을 담은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혼인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 개념의 가족에 초점이 맞춰졌던 가족정책이 1인·2인 가구, 미혼모·미혼부·다문화 가정 및 이혼·동거 부부 증가와 성평등 추세 등에 맞춰 확 바뀐다. 달라진 시대 환경에 따라 개선하거나 신설해야 했던 정책도 있지만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의 개념과 역할에 큰 변화가 불가피한 정책을 성급하게 추진할 경우 사회적 혼란과 부작용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여성가족부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가족 형태 다변화와 개인 권리에 대한 관심 증대 등 시대 흐름을 감안해 다양성과 보편성, 성평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족정책을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기본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혼인·혈연·입양만을 ‘가족’으로 인정하는 현행 법률 개정을 추진한다.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구가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9.8%로 줄어들고, 1인 가구(30.2%)나 2인 이하 가구(58.0%)의 비율이 커지는 등 가족 형태가 다양화하는 현실을 반영하려는 취지다. 가족의 범위를 규정하는 건강가정기본법과 민법을 개정해 동거·사실혼 부부, 돌봄과 생계를 같이 하는 노년 동거 부부, 아동학대 등으로 인한 위탁가족과 같은 다양한 가족 형태를 포용할 방침이다.
자녀의 성(姓)을 결정할 때 아버지 성을 우선하던 기존의 원칙 대신 누구 성을 물려줄지 부부가 협의해서 정하게 된다. 미혼모가 양육하던 자녀의 존재를 친부가 뒤늦게 알게 됐을 때, 아버지가 자신의 성을 강제할 수 있도록 한 현행 민법 조항도 개정한다. 친모의 성명 및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거나 친모가 협조하지 않으면 출생신고가 불가능했던 미혼부 자녀의 출생신고 차별도 없앤다.
결혼 관계 밖에서 태어난 자녀를 ‘혼외자’로 구분해 민법과 출생신고서에 표기하는 기존 친자관계 법령도 개정을 검토한다. 모든 아동이 빠짐없이 국가에 출생신고가 되도록 의료기관이 국가기관에 아동 출생을 통보하는 ‘출생통보제’를 도입한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에 대해서는 비록 일부를 지급했더라도 법원이 감치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제도를 강화한다.
다문화가족에 대한 혐오발언 등을 금지하는 법조항도 신설한다. 가정폭력 범죄에 대해 피해자의 요구가 있어야만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하고, 가정폭력을 저지른 ‘배우자’의 범위에 동거인도 포함시킬 방침이다.
◆姓 다른 친형제도 인정 … “가족 해체·분화 가속화할 것”
정부가 27일 확정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에 따라 아버지의 성을 원칙적으로 적용하는 부성우선주의나 혼인·혈연·입양으로 맺어진 관계만을 가족으로 인정하던 전통적 가족제도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시대적·사회적 상황이나 초저출산 대응을 위해 필요한 변화라고 하면서도 국민적 공감대 등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도 많다고 밝혔다.
제4차 기본계획은 바뀐 가구 지형에서 비롯됐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15년 27.2%이던 1인가구 비중이 올해 1분기에는 40%가량으로 늘었다. 그중 20∼30대가 34.8%를 차지한다. 반면 전형적인 가족 형태로 여겨지는 부부와 미혼자녀 가구 비중은 2019년 기준 29.8%로 줄었다. 정부가 민법에서 아예 ‘가족’의 정의를 삭제하거나 부모 혼인 여부에 따라 자녀를 구분 짓는 ‘혼인 외 출생자(혼외자)’, ‘혼인 중 출생자(혼중자)’ 용어 폐기를 검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주목받은 방송인 사유리(본명 후지타 사유리)씨처럼 혼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산한 가정, 비혼 동거 가구, 1인가구 등도 각종 제도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법적 가족으로 인정할지 논의할 방침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여가부는 이미 한부모가족지원법에 따른 아동양육비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사안에 따라 충분한 공론화를 통한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급히 추진할 경우 적잖은 진통과 혼란이 우려되는 대목도 있다. 당장 전통적 가족 형태를 중시하는 종교·보수성향 시민단체는 “가족제도를 해체할 수 있다”며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날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입장문을 통해 “전통적 가정과 가족의 해체 및 분화를 가속화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비혼 출산까지 가족으로 포함할 경우 무분별한 출생이나 부모가 자녀 성을 정하는 과정에서 형제·자매의 성이 다를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그러나 성평등 선진국가로 도약하고 초저출산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가족제도 변화가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족제도 변화를 호주제 폐지에 빗대며 ‘부계혈통중심주의’가 강한 우리 사회가 겪는 진통으로 봤다. 신 교수는 “유엔이 전 세계 성평등 추진전략 첫 번째로 꼽는 내용이 자녀의 부모 성 선택”이라며 “실제로 자녀 성을 마음대로 정하라는 뜻이 아니고 한국 사회가 더 유연하고 개방적으로 변했다는 메시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혼인·혈연·입양 외에 다양한 관계를 가족으로 인정하는 것은 혼인 기피현상 등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거부하는 청년층 사이에서 초저출산 문제를 해소할 실마리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다문화 가족에 대해서는 이들이 문화, 인종, 출신 국가 등을 이유로 차별이나 편견에 시달리지 않도록 다문화가족지원법에 혐오발언 등을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한다. 아울러 다문화 가족의 영유아기·학령기 자녀에게 방문교육과 언어발달 지원을 제공하고 청소년기 자녀에게는 이중언어 역량을 개발하도록 도울 예정이다. 중도 입국하는 청소년기 자녀에게는 조기 적응을 위한 정책도 펼친다.
자녀 양육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상속에서 제외시키는 일명 ‘구하라법’ 도입도 검토한다. 가족 공동체 간 재산 등에 대한 권리관계를 명시하고 분쟁 해결 방안을 담은 안내서(매뉴얼)도 제작해 보급할 예정이다. 법률혼이나 혈연이 아니면서 서로 돌보는 관계에 있는 대안적 가족도 유족급여·보상 등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검토한다.
정영애 여가부 장관은 “기본계획의 기본적인 목표는 모든 가족이 차별받지 않고 함께 인권이 존중되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공감대를 지속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