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의원에 다녀온 환자가 실손의료보험사에 엉뚱한 병명으로 보험금을 청구한 경우가 최근 5년간 5183만 건에 달하고, 이들에게 보험금으로 10조6000억원이 지급된 것으로 감사원 감사 결과 드러났다. 병·의원을 아주 많이 이용해 의료비 본인 부담금을 연간 상한 이상으로 내고 차액을 이듬해 건강보험에서 돌려받은 가입자가 실손보험금까지 이중으로 받아 챙긴 경우도 최근 4년간 8580억원어치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실손보험금 이중 지급만 막아도 전체 실손보험 가입자가 보험료를 매년 6400원씩 덜 낼 수 있는 것으로 계산됐다. 실손보험 가입자로 인해 추가로 발생하는 진료비는 연간 최대 23조28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감사원이 14일 공개한 ‘건강·실손·자동차보험 등 보험 서비스 이용 실태’ 감사 보고서에 따르면, 감사원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함께 2018 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의 건강보험과 민간 실손보험, 자동차보험에 보험금 지급이 청구된 약 10억 건 전체를 1년 9개월에 걸쳐 분석했다.
한국의 건강보험 체계는 건강보험 가입자가 병·의원을 이용해 발생한 진료비 가운데 60~70%를 건보공단이 부담하고, 가입자는 30~40%만 부담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 진료비가 10만원이라면, 환자가 병·의원에서 결제하는 진료비는 3만~4만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1999년 도입된 의료비 실손보험은 이 본인 부담금 3만~4만원의 최대 90%를 보험금으로 지급해, 환자가 체감하는 진료비 부담을 3000~4000원까지 낮춰준다. 2022년 기준 건강보험 가입자 5145만 명의 77.7%인 3997만 명이 민간 보험사의 실손보험 상품에도 가입해 있다.
실손보험 상품은 환자가 내야 하는 본인 부담금의 일부를 보험금으로 주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건강보험의 부담을 늘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병·의원을 한 번 갈 때 들어가는 부담이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환자가 병·의원에 한 번 가던 것을 두 번, 세 번 가게 되면, 건보공단이 병·의원에 주는 건강보험금도 두 배, 세 배로 늘어나게 되면서 건강보험 지출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감사원과 건보공단이 분석해 보니, 실제로 실손보험 가입자들의 의료 서비스 이용 행태가 건강보험 재정에 큰 부담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보험·실손보험에 모두 가입한 사람들은 건강보험만 가입하고 실손보험에는 가입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병·의원을 연평균 2.33일 더 갔고, 이로 인해 진료비가 매년 12조9400억원 더 발생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3조8300억원은 건강보험에서 나가는 돈이었다. 감사원은 “실손보험 가입자가 비가입자와 동일한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이용했다면, 건강보험 재정에서 연간 3조8300억원의 추가 지출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실손보험 가입자들이 추가로 이용한 의료 서비스는 물리치료와 백내장 수술, 발달 지연 치료, 갑상선 절제술, 자궁 수술, 유방 수술, 비강 수술, 하지정맥류 치료였고, 이로 인해 추가로 발생한 진료비는 연간 3조5201억원, 이 가운데 건보공단이 부담한 돈은 7210억원이었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한번 병·의원을 이용했다면, 해당 병·의원은 진료비의 30~40%는 이 환자에게서 직접 수납하고, 나머지 60~70%는 나중에 건보공단에 청구해 받게 된다. 환자는 본인이 결제한 진료비를 나중에 실손보험사에 청구해 그 가운데 최대 90%를 보험금으로 받게 된다. 이때 병·의원이 공단에 신고한 환자의 병명과, 환자가 보험사에 신고한 자신의 병명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치해야 한다.
그런데 감사원과 건보공단이 병·의원의 건강보험 청구 자료와 환자의 보험금 청구 자료를 교차 분석할 수 있는 1억1000만 건을 분석해 보니, 이 가운데 병·의원과 환자가 각각 신고한 병명(상병 코드)이 일치하는 경우는 53.5%(5963만 건)에 불과했고, 나머지 46.5%(5183만 건)는 일치하지 않았다. 환자가 의사가 건보공단에 신고한 환자의 병명과 다른 엉뚱한 병명으로 보험금을 타낸 것이다. 이렇게 지급된 보험금은 10조6000억원에 달했다.
감사원은 상당수 환자가 실손보험에 가입할 적에 자신의 지병을 숨겨 놓고는, 병·의원에서 지병 치료를 계속 받으면서 보험사에는 다른 질병으로 치료받은 것처럼 허위로 청구해 보험금을 타내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실손보험에 가입할 때 자신에게 암, 고혈압, 협심증, 심근경색, 심장판막증, 간경화증, 뇌졸중증, 당뇨병 등의 ‘10대 질환’이 있으면 보험사에 이를 미리 알려야 하는데, 이 경우 보험 가입이 거절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질환이 없다고 거짓말해 가입한 뒤에 보험금을 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감사원은 248만 명이 병·의원에서 10대 질환을 진단받고 5년 안에 실손보험을 가입하거나 갱신했고, 이 가운데 96%(239만 명)는 실제로 보험사에 자기에게 10대 질환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은 2018~2022년 5년간 병·의원에서 10대 질환 진료를 154만 건 받아놓고는 보험사에는 다른 질병으로 진료받았다고 신고해 보험금을 타냈는데, 이렇게 타낸 보험금이 5232억원에 달했다.
실손보험 가입자가 정신질환이나 비만처럼 실손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질병에 대해 진료를 받아놓고 보험사에는 다른 질병으로 진료받았다고 신고해 보험금을 타낸 경우도 102만 건 확인됐다. 이를테면, ‘정신 및 행동장애’로 진료를 받아놓고, 실손보험에는 ‘달리 분류되지 않는 통증’으로 진료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 청구로 의심되는 건에 지급된 보험금은 1814억원이었다.
실손보험 가입자와 병·의원이 함께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도 다수 나타났다. 환자가 실손보험금을 청구해 받아 갔는데 병·의원은 건강보험에 진료를 신고하지 않은 경우가 2018~2022년 5년간 730만 건에 달했고, 이로 인해 지급되지 않은 건강보험금은 2조2473억원이나 됐다. 정상적인 진료였다면 병·의원들이 당연히 건보공단에서 돈을 받아 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감사원이 이 가운데 일부 표본을 살펴보니, 성형외과의원이 피부 미용과 도수 치료(실제로는 마사지)를 해준 경우 등인 것으로 드러났다. 병·의원 입장에서는 건보가 보험금을 지급하는 의료 행위가 아니라서 건보에 보험금을 청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실손보험사에는 근골격계 손상, 피부 질환, 비염’ 등으로 신고하고 보험금을 타갔다.
한편, 건강보험에는 본인 부담금 상한 제도가 있다. 가입자가 한 해에 병·의원을 가서 진료받고 낸 본인 부담금이 연간 상한액(가입자 소득에 따라 83만~598만원)보다 많으면, 이듬해에 차액을 건보공단이 가입자에게 돌려주는 제도다. 이 차액만큼은 결과적으로 가입자가 실제로 낸 돈이 아니므로, 가입자는 관련 실손보험금까지 타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감사원이 확인해 보니,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이런 가입자에게 실손보험금 8580억원이 이중으로 지급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보험금을 이중으로 타가는 가입자가 사라진다면, 실손보험 가입자 전체의 보험료 부담이 연간 6400원 줄어들 수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자동차보험사 등으로부터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치료비’를 미리 지급받은 환자가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된 진료를 받으면서 건보도 매년 822억원을 추가로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됐다.
감사원은 실손보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도덕적 해이가 주로 건강보험과 실손보험 간에 정보가 연계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라고 봤다. 건보공단과 실손보험사들이 서로 정보를 연계한다면, 동일 진료 건에 대해 병·의원이 건강보험에 보험금을 청구하며 신고하는 내용과 환자가 실손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며 신고하는 내용이 교차 검증돼 부정 청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감사원은 이번 분석 결과를 건강·실손보험 관련 제도를 개선하는 데 사용하라며 보건복지부와 금융위원회 등에 전달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