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시상하부 뉴런, 장 세균 변화 직접 감지→식욕, 체온 조절
장 세균 세포에서 떨어진 NOD 2 수용체, 매개 물질 역할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 저널 '사이언스'에 논문
'장뇌 축'의 작동 메커니즘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장(腸)의 미생물(gut microbiota) 세포에서 떨어진 부산물은 혈액을 타고 순환하면서 면역, 물질대사, 뇌 기능 등을 조절하는 거로 알려졌다.
장과 뇌 사이에 신호 전달 경로가 존재한다는 '장뇌 축'(gut-brain axis) 이론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이론을 입증할 만큼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장뇌 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지도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침내 프랑스 과학자들이 뇌와 장 미생물 사이의 신호 교환 메커니즘을 밝혀냈다.
장 생태계에 변화가 생기면 뇌의 시상하부 뉴런이 곧바로 이를 감지해 식욕, 체온 등을 조절한다는 게 요지다.
비유하자면 뇌가 장 세균과 직접 의사를 소통한다는 뜻이다.
이 발견은 장차 비만, 당뇨 등의 대사 질환을 퇴치하는 획기적인 치료법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
파스퇴르 연구소 과학자들이 주도한 이 연구엔 프랑스의 국립 보건의료연구소(Inserm)와 국립 과학연구원(CNRS) 과학자들도 참여했다.
관련 논문은 최근 저널 '사이언스'(Science)에 실렸다.
장의 미생물
모유를 먹이면 아기에게 크론병, 천식 등의 자가면역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아기의 장 세균이 모유의 올리고당을 분해해 혈액 및 장 염증과 면역 이상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장은 인체 내에서 가장 큰 세균 저장소다.
한마디로 인간과 장 세균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다. 장 세균은 숙주인 인간에 기생하면서 소화 작용 등을 돕는다.
이른바 '장뇌 축' 이론은 이런 상호의존 관계가 훨씬 더 깊다고 주장한다.
장의 미생물 총(叢)이 장 신경망이나 뇌에 직접 영향을 주거나 반대로 뇌의 활성도가 면역세포를 통해 장 미생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로토닌 같은 매개 물질은 혈류를 타고 장과 뇌 사이를 오가면서 빠르게 신호를 전달한다.
이번 연구는 뇌와 장 사이에서 이런 연결축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걸 입증했다.
'장이 튼튼해야 뇌도 건강해진다'라는 주장에 충분한 근거가 있는 걸 보여준 셈이다.
파스퇴르 연구팀이 초점을 맞춘 건 보통 면역세포 내에 존재하는 NOD 2라는 수용체다.
NOD를 풀이하면 '뉴클레오타이드 저 중합체화 도메인'(nucleotide oligomerization domain)이란 뜻이 된다.
이 수용체는 세균의 세포벽 구성 요소 중 하나인 펩티도글리칸(peptidoglycan)을 감지한다. 펩티도글리칸은 다당류에 짧은 펩타이드 고리가 결합한 걸 말한다.
NOD 2 수용체 코드를 가진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크론병, 감정 장애(mood disorders), 소화불량 등과 연관돼 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 정도론 뇌와 장의 직접적 상관관계를 입증하기 어려웠다.
장 미생물이 뇌 기능과 기분 조절에 관여하는 메커니즘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구팀은 생쥐 모델의 뇌를 fMRI(기능적 자기공명 영상법) 같은 영상 기술로 관찰했다.
NOD 2는 뇌의 여러 영역에 존재했다. 하지만 특히 시상하부에 많았다.
그런데 장에서 혈류를 타고 온 펩티도글리칸과 접촉하면 NOD 2가 있는 시상하부 뉴런의 전기적 활성이 억제됐다.
반대로 시상하부 뉴런에 NOD 2가 발현하지 않을 경우 펩티도글리칸과 접촉해도 전기 활동이 둔화하지 않았다.
NOD 2가 없는 생쥐는 뇌가 음식 섭취와 체온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체중이 증가했다.
이런 생쥐는 2형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커졌는데 특히 나이 든 암컷이 더 위험했다.
장과 혈액, 뇌 등에 펩티도글리칸이 존재한다는 건 장 세균의 급격한 증식을 알리는 생물지표라고 과학자들은 지적했다.
뇌의 시상하부 뉴런이 장 세균의 세포막에서 떨어진 펩티도글리칸을 직접 감지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 시상하부가 체온, 시장기, 갈증, 생식 기능 등을 조절하는 뇌의 핵심 중추라는 점에서 더 그랬다.
과학자들은 면역세포가 이런 기능을 하는 걸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뇌가 직접 했다.
뇌는 장 세균의 증식, 사멸 등을 감지해 음식물 섭취가 장의 생태계에 어느 정도 충격을 주는지 곧바로 알아냈다.
파스퇴르 연구소의 '미세환경 면역 유닛(unit)' 책임자인 제라 에벨 박사는 "어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장에서 특정 병원체나 세균의 성장만 자극해 전체 미생물 총의 균형을 위협할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연구 결과를 실제로 임상에 적용하려면 아직 연구할 게 많다.
특히 뇌과학, 면역학, 미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공동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연구가 충실히 진행되면 뇌 질환, 당뇨병, 비만 등의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될 거로 과학자들은 기대한다.
cheon@yna.co.kr